02
햐쿠엠(100M)을 봤다.
원작 작가는 만화를 그리지 않으면 살 수 없는 타입의 인간 같다는 생각을 했다.
만화를 그리기 위해 태어난 것과는 조금 다르다.
만화를 엄청 잘 그리고 스토리가 엄청나게 탁월한 건 아닌데
이 정도 에너지의 이야기를 풀어내지 못하고 가슴 속에만 가지고 있으면 사람은 살 수가 없다……
이 작품도 그렇고, 지-지구의 운동에 대하여-도 그렇고, 우오토 작가의 작품에서 등장인물들은 거의 다 앞으로의 인생, 목숨 이런 걸 걸고 움직이지 않나. 거기서 나오는 에너지라는 건 엄청난 거고, 이런 에너지를 창작으로 뿜어내지 않으면 사는 게 너무 고달픈 일이 되어버린다.
나쁜 의미로든 좋은 의미로든 우오토 작가는 자신에게 집중하는 인물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트위터의 어떤 분께서 ‘A가 B에게 열등감을 느끼지 않았던 점이 인상깊었다’ 는 트윗을 써 주셨는데(스포일러가 될 수 있으니 일단 필터링 했다. 이 이야기에서 이 두 인물이 누구인지 중요하지도 않다.) 나는 그것을 작가가 타인을 보고 열등감이나 조바심을 별로 느끼지 않으니 묘사하지 않은 것이 아닌가 하는 마음이 들었다. 타인에게 열등감과 조바심을 느끼는 인간이면 부족한 작화 실력을 가지고 만화를 그릴 리가 없으니까…
내게는 이 작가는 오직 하고 싶은 이야기를 내 안에서 꺼내고 싶다, 이 이야기를 내 안에서 꺼내야만 한다! 라는 욕망으로 만화를 그리는 것처럼 보인다는 말이다. 다른 이유가 있더라도 이 이유가 크지 않을까 싶다.
그렇게 작가가 분출한 만화가 독자를 찌른다. 어떤 작가는 독자에게 상처를 주기 위해 만화를 그린다고 한 적이 있었는데, 우오토는 그럴 심산은 아닌 듯했다. 그렇다고 그가 만화로 독자를 찌른다는 사실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진심은 창이 될 수밖에 없다. 누군가를 상처 입히기도 하고, 누군가의 마음 깊숙한 곳까지 찌르고 들어가기도 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독자들을 찔러대는 우오토 작가는 독자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그의 창작 세계에서 독자가 어느 위치에 어느 정도의 크기로 존재하는지 궁금하다.
이 추측은 그가 모에와 일말의 타협도 하지 않는, 소위 ‘리얼리스트’처럼 보이기 때문도 있다. 그는 그다지 만화의 등장인물에 ‘모에’나 ‘과한 데포르메’라는 렌즈를 댈 생각이 없어 보인다. 지. 에서는 크게 두드러지지 않지만 본작의 등장인물은 모두 일본의 어딘가에 살아있을 것 같은 외관을 하고 있지 않나. 물론 내면이나 실력은 꽤나 비범하지만, 겉모습만 놓고 보면 도쿄에서 전철 30분만 타고 있어도 (카이도를 제외하고)전부 볼 수 있는 모습들 아닌가. 심지어 영화는 로토스코프 기법을 사용해 만들어지기까지 했다. 다만 이 이야기에서 등장인물들이 철저히 현실적인 모습이어야 하는 이유가 있었다고 생각된다.
아래부터는 엔딩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으니, 스포일러를 원치 않으면 읽지 않기를 추천한다.
이 영화는 토가시와 코미야 중 누가 우승했는지 보여주지 않고 끝낸다. 그것이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게 왜 중요하지 않을까? 코미야에게 있어서도 진다면 인생의 어떤 변곡점이 될 수 있고, 토가시에게는 계약 조건과 앞으로의 인생이 달린(휴식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이미 내려놓았다고 볼 수 있겠지만은) 아주 중요한 문제 아닌가.
작중에서 카이도라는 인물은 이렇게 말한다.
“내가 이기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라면, 나는 전력으로 현실로부터 도피할 거다.”
또, 이렇게도 말한다.
“현실 도피를 한다는 건 현실을 직시해야 할 수 있는 거다. 현실 앞에 눈을 감는 것과, 현실을 직시하고 도피하는 것은 아주 다른 거다.”
그렇다. 사실 정말 중요하다. 앞으로 남은 토가시(고작 20대)와 코미야(얘도 고작 20대)의 인생에 있어 작은 일이 아니다. 영화 내내 등장인물들은 그렇게 말한다. 그 100m에 인생이 바뀌기도 하고, 인생이 망하기도 한다고. 실제로 토가시는 앞으로의 운동 인생을 걸고 뛰었다. 그렇지만 결국 영화는 누가 이겼는지 보여주지 않는다.
그게 중요하다는 것을 안다. 동시에, 그것으로부터 도망친다.
즐거우니까 된 거다. 진심으로 달렸으니까 된 거다. 좋아하는 것에 모든 것을 바쳐서 아직 울고 웃을 수 있으니까 된 거다.
그게 이 작품이 현실을 직시하고, 도피한 방향이다.
그러기 위해서 이 작품은 현실적인 모습이어야만 했다. 현실을 보지 않는데 어떻게 현실 도피를 하겠는가.
자이츠가 느껴주기 바랐다고 말했던 극상의 10초는 작가가 그려내고자 했던 현실 도피의 클라이맥스이니, 그의 세계에 독자는 분명 있을 것이다. 그런 독자로서, 독자에게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던지는(투척하는 이라고 써도 무방할 것 같다.) 작가 우오토의 앞으로가 기대된다. 그는 또 어떤 방식으로 현실을 그리고, 어떤 방식으로 그 현실에서 도피할까? 그것이 정말 궁금하다…….